[TV서울=이천용 기자] ## 아들을 전교 1등 만들려는 변호사 엄마가 학교 교무부장과 손잡고 시험지를 훔친다. 아들은 그 덕에 전교 1등을 하지만 곧 엄마가 시험지를 훔쳤다는 사실을 알고 "이건 반칙이잖아요"라고 절규한다. 그러나 엄마는 자수하자는 아들의 말에 "엄마 죽는 꼴 보고 싶냐"고 소리친다.(tvN 드라마 '일타 스캔들')
## '3대째 의사 가문 만들기'에 올인한 엄마는 모의고사 성적이 하락한 딸 때문에 입시코디를 다시 찾고 학교에서 빼돌린 중간고사 시험지를 보고 또 한번 흔들린다.(JTBC 드라마 '스카이 캐슬')
드라마에나 나오는 내용이 아니다. 성적지상주의가 현실 세계에서 시험지 도둑질을 잇달아 낳고 있다.
학생, 학부모, 교사에 의한 시험지 도둑질은 공정해야 할 시험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우리 사회를 지탱할 상식과 윤리를 뒤흔든다.
전문가들은 교육·평가 시스템을 투명하게 정비해야 하며, 근본적으로는 성적 하나로 미래를 가늠하는 단선적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 학부모·교사·시설관리자까지 공모…'숙명여고 사건' 되풀이
지난 4일 한밤중 경북 안동시 한 고등학교에서 30대 전직 기간제 교사와 40대 학부모가 함께 시험지를 훔치려다가 사설 경비 시스템에 덜미가 잡혔다.
경찰은 이들 사이에 금품이 오간 정황을 확인했으며, 이들이 학교에 침입하는 과정에서 학교 시설 관리자의 조력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이번 사건은 교사·학교 내부자와 학부모가 공모해 시험지를 유출했다는 범행 구조상 2018년 충격을 안긴 '숙명여고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숙명여고 전임 교무부장 A씨가 같은 학교 재학생인 자신의 쌍둥이 딸들에게 시험문제를 유출한 사건으로, 시험지를 빼돌린 학교 내부자가 곧 교사이자 학부모였다.
교육열 치열한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시험지 유출이 발생한 점, 중상위권이었던 쌍둥이 자매의 성적이 1년여 만에 급상승해 나란히 문·이과 전교 1등을 하게 됐다는 점에서 당시 큰 논란이 됐다. A씨는 2020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을 확정받았다. 쌍둥이 딸들에 대해서도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됐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지 도둑질은 그전에도 있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전국연합학력평가의 고1 영어영역 문제와 정답이 학원 강사 등 3천200여명이 모인 오픈채팅방에 유출돼 교육당국이 수사를 의뢰했다.
2022년 부산의 한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는 수능 모의평가 당일 문제지 일부를 휴대전화로 촬영해 학원 강사에게 유출한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같은 해 광주 대동고에서는 2학년 학생 2명이 교무실에 침입해 교사들의 컴퓨터에 악성프로그램을 설치한 뒤 시험문제와 답안을 빼돌렸다. 범행에 가담한 학생 중 한명이 코딩에 능해 주기적으로 노트북 화면을 캡처해 저장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이를 교사의 노트북에 몰래 심어둔 것이다.
이 학교에서는 4년 전에도 시험문제 유출이 발생했다. 2018년 학교운영위원장을 맡은 학부모가 학교 행정실장을 통해 시험 문제를 빼돌린 바 있다.
2017년에는 서울의 한 외국어고등학교 교사가 이 학교 출신인 영어학원 원장과 함께 영어시험 문제를 빼돌려 학원 수강생들에게 제공한 사건이 있었다.
◇ 성적을 향한 비뚤어진 욕심…"우리 사회의 기틀 흔들어"
입시 준비에 한창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반복되는 시험지 유출 사건에 분통을 터트렸다.
부산에 거주하는 고등학교 1학년 이강우(16) 군은 16일 "공정해야 할 교육이 부정으로 더럽혀진 현실에 참담하다"며 "어른들의 부정이 학생들의 노력을 짓밟았다"고 말했다.
중학교 교사이자 고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인 강모(53) 씨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기틀을 흔든다는 점에서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조작을 통해 높은 성적을 받은들 장차 아이가 올바르게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한 아이의 학부모로서 너무 화가 난다"고 밝혔다.
최근 교권이 하락한 상황에서 이러한 사건이 교육 현장 신뢰도 회복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도 우려했다.
강씨는 "지금도 민원으로 인해 재시험을 치르는 일이 계속 느는데, 이번 안동 사건으로 학교를 신뢰하지 못하는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고 개탄했다.
고등학생 자녀를 둔 김모(50) 씨도 "아이들이 학교에 침입해 시험지를 훔친 사건을 보면 안타깝기라도 한데, 다 큰 어른들이 시험지를 빼돌렸다는 것은 그저 화가 난다"며 "성적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아이의 미래보다 중요할까. 부모의 비뚤어진 욕심 때문"이라고 했다.
엑스(X·옛 트위터) 이용자 'waj***'은 "부모의 욕심으로 학생의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라고 했고, 네이버 카페 이용자 '네모**'은 "엄마 때문만은 아니다. 학생이 몰랐을 리 없다"고 남겼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시험지 유출 사건이 많을 것이라는 의심도 고개를 든다.
네이버 이용자 '춘식***'는 "안 들킨 수시 비리는 또 얼마나 많을까요"라고 남겼고, '초록***'는 "다른 학교에서는 잘 관리되는지 걱정된다"고 했다. 또 'cer***'는 "이번에 걸린 곳이 저기일 뿐 과연 이런 일이 여기만 있을까? 전국적으로 다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여러 수단으로 학생 능력 평가하고 관리 시스템 정비해야"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성적 지상주의의 민낯을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조상식 동국대 교육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는 결국 미래를 설계하는 데에 있어 입시를 통한 대입 성공이 결정적인 국가라는 점을 보여준다"며 "미국과 같이 성공의 경로가 다양한 사회가 아닌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모두가 교육을 둘러싸고 일종의 쟁탈전을 벌이는 상황"이라며 "학벌 위계, 입시, 직업 교육 시스템을 정비해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고 사회적으로 차별받지 않으며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사회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홍원표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앞서가야 하는 상대평가 제도와 성적 지상주의가 합쳐져 시험지 유출 사건이 반복되고 있다"며 "높은 성적이 윤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왜곡된 인식이 자리 잡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수단으로 학생의 능력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며 "각 방법에 대해 신뢰성과 공정성을 확보하는 과정이 어렵겠지만, 지필 평가만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날 필요는 있다"고 했다. 학생 평가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현장 감독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시험지 유출이 반복되는 것은 교육 및 평가 시스템이 투명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는데 그에 맞춰서 시스템은 투명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경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시스템이 철저히 정비되고 룰이 투명해져야 한다"며 "교사들에 대한 윤리 교육과 처벌을 강화하고, 이를 감독하는 인력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도 "유혹에 흔들리는 사람은 항상 발생할 수 있으니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을 통해 시험지 유출을 방지하고, 교사 간 상호 감시 제도를 도입해 선량한 학생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함으로써 학교가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