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서울=변윤수 기자]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300억 원의 존재가 딸의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30여 년 만에 새로 드러났다.
다만 현실적으로 이 돈이 실제 노 전 대통령의 추가 비자금이었다는 점을 규명하거나 추징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 법조계의 분석이다.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가사2부(김시철 김옥곤 이동현 부장판사)는 전날 역대 최대인 1조3,808억 원을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에게 현금으로 분할하라고 선고하며 이 자금에 대한 판단을 했다.
재판부는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가 보관해온 1991년 선경건설(SK에코플랜트 전신) 명의 약속어음과 메모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의 자금 300억 원이 최 회장의 선친인 최종현 전 회장에게 흘러 들어갔다고 인정했다.
이 메모는 김 여사가 1998년 4월과 1999년 2월에 노 전 대통령이 조성한 비자금을 기재한 것이다. 여기에 '선경 300억 원'이 쓰여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여사는 또 '선경 300'이라는 문구가 기재된 봉투에 액면가 50억 원짜리 어음 6장을 넣고 보관했다고 한다.
노 관장 측은 항소심에서 메모와 어음을 증거로 제출하며 1991년 노 전 대통령이 비자금 300억원을 건네는 대신 최 전 회장은 담보로 선경건설 명의로 이 어음을 전달했으며, 이 돈이 1991년 태평양증권 인수나 선경(SK)그룹의 경영활동에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 돈이 SK그룹 성장의 종잣돈이 됐다고 판단하며 재산분할 액수를 1심의 20배 수준으로 높였다.
최 회장 측은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활동비를 요구하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고 항변했지만, 재판부는 노 전 대통령 형사사건의 최 전 회장 진술을 토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최 전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이 취임한 해인 1988년 30억 원을 준비해 갔는데, 노 전 대통령은 "사돈끼리 돈을 주고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물리쳤다고 진술했다.
재판부는 "이미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확보한 노 전 대통령이 과거 돈을 돌려보낸 상황에서 이런 약속(활동비)을 하면서 약속어음을 받았다는 것을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최종현 전 회장의 태평양증권 인수 자금이 불투명하다는 의혹은 인수 이듬해부터 제기됐다.
1992년 10월 민주당 김원길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최 전 회장의 연 세후소득이 10억에 미치지 못하는데도 매입 대금 약 600억 원을 지급한 점이 의문이라며 자금 출처를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자금 의혹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1995년에도 김 의원은 "자금조성내역은 현금 68억 원, 채권매각 317억 원, 주식매각 16억 원, CD(양도성예금증서) 매각 236억 원 등 모두 637억 원이었다"며 "이 중 채권과 주식의 실소유자가 전직 대통령(노 전 대통령)과 연관돼 있다"고 주장했다.
1995년 비자금 의혹을 수사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최 전 회장을 조사했지만, 그 자금 출처를 노 전 대통령 비자금으로까지 연결하지는 못했으며 추징금 2,628억 원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결국 첫 의혹 제기 32년 만에 비로소 노 전 대통령 측에서 비자금이 맞다고 시인한 셈이다.
그러나 이 돈이 다른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처럼 형사·사법절차를 통해 불법자금으로 인정돼 국고로 환수되기는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일단 당사자인 노 전 대통령이나 최 전 회장이 모두 사망했고 소멸 시효 문제도 있기에 수사 기관이 비자금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수사에 나서기가 어려운 상태다.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혐의를 수사하기에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증거 확보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공소시효(5년)도 한참 지났다.
최 회장 측은 항소심에서 태평양증권의 매입 자금은 선경 계열사에서 조달한 돈, 즉 횡령금이라며 비자금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재판부는 관련 자료가 없다며 이 주장을 배척했지만, 이 자금이 비자금이 맞는지 여부까지는 판단하지 않았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비자금으로 확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현재 이를 추징하거나 환수할 방안은 없다고 봐야 한다"며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면 환수할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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