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서울=나재희 기자] "이대로라면 한여름 고랭지에서 갓 생산한 신선한 여름배추를 먹을 수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마저 드네요."
고랭지(여름)배추 재배 최후의 보루인 강원 고랭지채소밭이 기후 격변에 신음하고 있다.
'높을 고(高), 찰 랭(冷)'이라는 이름값이 무색할 만큼 올여름 폭염은 고랭지채소밭도 녹였다. 고랭지배추 농사를 평생 지어온 농민들마저 혀를 내둘렀다.
추석 전까지 국민 식탁을 책임지는 여름배추의 수확량이 폭염으로 6∼8%가량 감소하자 온 나라가 들썩였다. 폭염이 9월에도 이어지면서 여름배추 생산량 감소 폭은 10% 이상 두 자릿수를 웃돌 것이라고 관측이다.
여름배추의 90∼95%를 책임지는 강원 고랭지배추 재배 농가의 가슴은 폭염에 녹아내린 배춧속만큼이나 문드러지고, 노랗게 병든 배춧잎처럼 타들어 간다.
국민은 한 포기에 1만5천원에서 2만원 가까운 배춧값에 아우성치고 정부는 추석 물가 걱정에 봄배추 비축분을 풀어 가격조절에 안간힘을 쓰고있다.
한여름 나라 경제를 뒤흔들 정도로 민감한 작목인 고랭지배추의 생산량과 재배면적 감소는 기후 격변의 또 다른 경고음이다.
기상청의 기후변화시나리오(SSP5-8.5)에 따르면 도내에서 가장 기온이 낮은 태백의 연평균 최고기온은 2021년 14.6도에서 2051년 16.9도, 2071년 18.4도, 2091년 20.4도로 증가하는 것으로 예측됐다. 70년 사이 5.8도나 증가하는 셈이다.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는 이 시나리오를 토대로 2050년 고랭지배추 재배 적지가 눈에 띄게 줄어 2090년에는 아예 사라질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전문가들은 예측하기 힘든 폭염 등 기후 격변이 고랭지배추의 고질병인 병해와 바이러스에 의한 연작(連作) 피해를 더 가속화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 "50년 농사에 올해 같은 폭염·가뭄은 처음…절반도 못 딴 배추밭 허다"
평균 해발 1천100m가 넘는 거대한 배추밭인 강원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일명 안반데기.
국내 최대 고랭지 재배단지인 이곳에서는 추석을 앞두고 막바지 출하가 한창이다. 축구장 면적(0.714㏊)의 231배인 165㏊가 온통 배추다.
태백 매봉산·귀네미골과 더불어 국내 3대 고랭지 채소단지로 손꼽히는 이곳에서 50년째 고랭지배추 농사를 짓는 김시갑(71)씨는 "한꺼번에 폭염과 가뭄을 이렇게나 오래 겪은 해는 평생 처음"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10∼20% 손실이 보통이지만 올해는 30%가 넘는다"며 "고온과 가뭄 지속으로 일명 꿀통 배추가 많아 수확량 감소는 물론 결구율(배추가 단단한 정도)이 떨어져 상품성도 좋지 않다"고 걱정했다.
꿀통은 배춧속이 가운데서부터 녹아버리는 고온 피해를 말한다.
안반데기에서 9㏊(2만7천평)의 배추 농사를 짓는 대기 4리 이병익(42) 이장은 "폭염으로 노지에 버리는 배추가 30%가 넘는다. 70%만 따도 성공"이라며 "저 아래 700m 배추밭은 더 심각하다. 절반도 못 딴 밭이 허다하다"고 말했다.
고랭지배추 농가를 엄습하는 더 큰 공포는 고질적인 연작 피해가 기후 격변으로 더 가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감자 등 여러 작목을 번갈아 심었던 안반데기에서도 이제는 배추만 심게 됐고, 연작으로 인한 병해·바이러스 피해는 피할 수 없었다.
여기에 더해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듯이' 올해 오랜 폭염으로 연작 피해가 더 심해졌다고 농민들은 입을 모았다.
"이러다 재배면적이 급감한 태백 매봉산 선례를 답습하는 것 아니냐"는 게 안반데기 농민들의 우려다.
◇ 기후 격변 직격탄 맞은 매봉산…2090년에는 아예 사라진다
고랭지배추 재배단지의 원조 격인 태백 매봉산 일원은 기후 격변의 직격탄을 맞았다.
1965년 화전민 정착촌 사업으로 매봉산 일원을 중심으로 조성된 태백 고랭지배추 재배면적은 20년 전인 2003년 1천54㏊에 달했다.
축구장 면적의 1천476배였던 배추밭은 올해 400㏊로 급감했다. 21년 만에 축구장 면적 916개에 해당하는 654㏊의 고랭지배추밭이 사라진 셈이다.
이는 곧 강원 고랭지배추의 재배면적과 생산량 감소로 이어졌다.
15일 통계청과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강원도 등에 따르면 강원 고랭지배추 재배면적은 2021년 5천143㏊에서 2022년 4천69㏊로 감소했다.
6천284㏊에 달했던 2003년보다 20년 만에 2천215㏊나 급감했다.
생산량은 2003년 23만8천289t에서 2022년 17만8천736t으로 주저앉았다.
태백의 고랭지배추 생산 기반 붕괴는 '시스트선충'(cyst nematode)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2011년 태백에서 국내 처음 발생한 시스트선충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검역관리 병해충이다. 배춧과 작물의 뿌리에 기생해 생육 부진과 시듦병을 유발한다.
평소 땅속 70㎝ 아래서 활동을 멈췄다가 기온이 24∼25도로 올라가면 밖으로 나와 출하를 앞둔 배추를 망가뜨린다. 반쪽시드림병과 함께 고온 피해의 주범이다.
시스트선충에 감염된 농지는 휴경하고 손실보상금을 지급하는데, 평당 4천원인 보상금이 오히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이 농가에는 독으로 작용, 재배면적 감소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 준고랭지로 확대 '극약처방'…"고랭지배추 농가 죽이려는 정책"
한여름 국민 입맛을 책임지는 고랭지배추는 연중 16%를 차지한다.
강릉 안반데기, 태백 매봉산·귀네미, 삼척 하장, 평창 대관령·진부, 정선 임계 등 5개 시군의 고랭지 재배단지에서 여름배추의 90∼95%를 담당한다.
41%의 김장배추(가을)와 32%인 봄배추보다는 큰 비중은 아니지만 폭염, 폭우 등 이상 기후로 작황이 늘 들쭉날쭉해 수급 조절에 매년 애를 먹는다.
추석 전후 가격 폭등이 빈번하다 보니 농업당국 입장에서 고랭지 배추는 가장 중요한 작목이면서 늘 골칫거리다.
당국은 그동안 봄배추를 창고에 보관했다가 고랭지배추 작황이 나빠지면 비축분을 풀어 가격을 조절하는 정책을 써왔다.
고랭지 농가들은 여름배추 출하 시기에 비축분으로 값을 떨군다며 불만이지만 안정적 먹거리 공급 차원이라는 점에서 이해하고 감내해왔다.
당국 역시 수급 불안정 해소를 위해 병해와 바이러스 등 연작 피해를 줄이는 노력을 해 달라고 농가에 주문하고 있지만 잘 따라와 주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고민 끝에 당국은 봄배추 비축분 조절 정책에 더해 여름배추 생산 기반을 해발 400∼600m의 준고랭지 확대한다는 극약 처방을 내놨다.
5월에 정식해 6월 말에서 7월 초에 출하하는 평창 대화면과 방림면 등 준고랭지의 배추재배를 2기작으로 유도하거나 출하 시기를 늦춰 여름배추 때와 맞추는 방안이다.
농촌진흥청은 국립식량과학원 고령지농업연구소에 '고랭지배추연구실'을 신설했다. 고온과 연작장해로 수급이 불안정한 고랭지배추의 안정적 생산을 지원하려는 조치다.
이 같은 여름배추 수급 정책의 전면적 전환에는 올해 유난했던 폭염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
농촌진흥청 기술보급과 원예기술팀장 박종윤 박사는 "여름배추 재배지를 준고랭지로 확대하는 시범사업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라며 "더위에 강한 품종인 '하라듀'와 함께 작목 기술을 보급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고랭지배추 생산 기반을 무너뜨리는 정책이라며 농가들은 반발한다.
농가들은 "약제 지원 확대 등 고랭지 보호를 위한 근본적인 처방이 더 시급하다"며 "준고랭지로 확대하는 시도도 좋지만, 기후 격변에 따른 고온 병해 대책 없이는 백약이 무효"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