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서울=변윤수 기자] 경기도 포천에서 400가구가 넘는 민간임대 아파트를 새로 건설한 A사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임대보증금보증에 가입하려다 날벼락을 맞았다.
신축 임대의 준공 허가를 받고 임차인 모집을 하려면 반드시 임대보증금보증에 가입해야 하는데, 보증 가입을 위한 HUG의 인정 감정평가 금액이 업체의 예상보다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된 것이다.
HUG 지정 감정평가 업체가 산정한 이 주택의 주택가격은 가구당 평균 2억5천200만원 선.
A사가 건설 원가와 시세 등을 고려해 책정한 이 주택의 예상 임대보증금(2억5천만원)과 주택도시기금 융자(1억원)를 합한 부채금액 3억5천만원에 비해 1억원이 낮았다.
이 회사가 올해 초 강화된 기준을 적용받아 임대보증을 받으려면 현재 평균 3억5천만원인 부채(보증금과 기금 대출) 총액을 주택가격의 90%인 2억2천680만원에 맞춰야 보증 가입이 허용된다.
당장 기금 대출을 갚을 순 없으니 결국 보증금을 당초 계획보다 가구당 평균 1억2천300만원가량 낮추던가, 그만큼을 HUG에 현금(예금) 등의 담보로 제공해야 보증 가입이 가능하다.
HUG가 A사에 보증 가입 조건으로 통보한 담보금액은 총 350억원이다.
현재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건설 임대주택은 사용검사 전까지, 사용검사 신청 전에 임차인을 모집하는 때는 임차인 모집일까지 HUG의 임대보증을 받아야 한다.
A사 관계자는 "중소 건설사가 350억원을 담보로 예치하면 회사의 운영 자금이 묶이면서 신규 사업이 중단되는 것은 물론이고 유동성에도 위험이 닥친다"며 "보증 가입 때문에 건설임대를 하는 중소 건설사는 도산 위기에 처했는데 정부는 일방적으로 제도를 바꿔놓고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업계 "HUG 감정평가액 20∼30% 이상 괴리"…곳곳에서 '아우성'
주택업계에 민간 건설 임대의 보증 대란이 현실화하고 있다.
전세사기 문제 이후 정부가 강화된 보증 가입 기준을 건설임대에도 적용하면서 수백, 수천 가구씩 임대사업을 하는 건설사들이 피해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정부는 전세사기 이후 2023년 5월부터 전세보증금반환보증의 주택가격 담보인정비율을 종전 100%에서 90%로 낮춘 것을 건설 임대사업 사업자들이 가입하는 임대보증금보증에도 동일하게 적용했다.
이와 함께 주택가격 산정 시 공동주택 기준으로 130∼150%였던 공시가격 적용 비율도 125∼145%로 강화했다.
과거에는 9억원 이하 아파트나 빌라의 임대보증에 가입하려면 전세 보증금이 공시가격의 150% 이내면 가능했지만, 지금은 근저당권이 없더라도 최소 '공시가격의 130.5%(공시가격의 145%×90%)' 이내여야 가입할 수 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전세사기 등에 대비해 주택가격 부풀리기(업감정)를 통한 전세사기, 보증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보증 가입 문턱은 높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막 신축한 건설임대는 공시가격이 없고, 공시가격이 있어도 시세의 절반에도 못 미쳐 결국 HUG가 인정한 감정평가를 쓸 수밖에 없는데 이 평가액이 지나치게 낮게 산정되면서 주택업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감정평가는 HUG가 미리 정한 5개 감정평가 법인에서 진행하는데 이 금액이 종전에 건설사 의뢰로 진행해온 평가액보다 20∼30% 이상 낮다는 것이다.
주택업계에 따르면 실제로 전북 완주군의 B 민간임대 아파트는 지난달 자체 감정평가에서 전용면적 60㎡의 주택가격이 2억5천700만원으로 산정됐으나, HUG의 인정 감정평가에선 1억9천100만원으로 71.5%에 그쳤다.
광주광역시 서구의 C 민간임대 오피스텔은 1년 전 보증 가입을 위한 감정평가에선 3억5천만∼3억6천만원으로 산정됐으나 지난달 HUG의 인정 감평금액은 절반을 밑도는 1억7천100만원으로 47% 선에 그쳤다.
만약 C사가 보증금을 낮추지 않으면 가구당 2억원의 현금이나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해야 한다.
건설사들은 보증 재가입을 하려고 섣불리 보증금을 낮출 수도 없다고 말한다. 임대료 인상률이 5%로 제한되기 때문에 보증금을 한 번 낮추면 임대 기간 종료 때까지 보증금을 다시 시세 수준으로 올리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현재 전국의 HUG 지점에는 주택업계의 임대보증 관련 민원이 쇄도하고 있다.
◇ "7만8천가구, 3.8조원 보증사고 우려"…전문가 "교각살우 우려…공급 확대에도 역행"
주택업계는 건설 임대주택은 개인 등 일반 임대사업자와 달리 보증금 미반환에 따른 보증사고가 거의 없는데 인정 감정평가 방식 등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실제 HUG가 더불어민주당 복기왕 의원실에 제출한 최근 5년간 임대보증(사용검사 후) 사고율 자료를 보면, 개인 임대사업자의 보증 사고율이 2023년 7.9%, 2024년에는 9.3%까지 치솟은 반면, 건설임대 사업자가 포함된 법인 임대 사업자의 사고율은 각각 0.4%, 0.8%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보증금 미반환 문제보다는 준공 전 보증서 발급 후 임대 분양 저조에 따른 보증사고가 대부분이라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주택업계는 이러한 제도 강화는 대규모 임대보증금 미반환과 보증사고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는 곧 영세한 주택업계는 줄도산으로 이어지고 HUG는 올해 들어 가까스로 줄여놓은 대위변제 부담이 다시 커져 '전세사기 시즌 2'가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주택건설협회가 최근 회원사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현재 160개 건설임대 사업장 7만8천410가구에서 임대 보증금 3조8천300억원 규모의 지급불능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주택업계는 HUG의 과소 감정평가 문제는 현재 임대보증뿐만 아니라 모기지보증, 공공지원 민간임대 등에도 모두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다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건설임대 사업자는 HUG 인정 감정평가 적용을 제외해주거나, 임대보증금보증 재가입시 인정 감정평가금액을 종전 주택가격 대비 연간 2.5%(2년 5%) 이내로 하한을 설정하는 달라는 것이다.
협회 김형범 정책관리본부장은 "임대주택은 분양주택의 시세와 동일하게 평가하기도 어렵고, 임대 의무 기간에는 매각이 불가능해 공시가격이나 시세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HUG가 선정한 평가업체의 감정평가가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이뤄지면서 주택업계의 피해는 물론 대규모 보증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만큼 서둘러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고민이다. 건설임대 보증 기준을 강화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데다 제도를 원상복구하면 '업감정' 등의 부작용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HUG 관계자는 "인정 감정평가 제도 시행 결과 종전 평가와 비교해 낮은 평가가 있는 반면, 높은 곳도 있다"며 "다만 이의신청 절차 부재 등에 대한 개선요청이 있는 만큼 관계 기관 협의를 거쳐 개선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전세사기 등 보증금 미반환 우려가 적는 건설 임대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자칫 주택업계는 물론 HUG와 임차인 모두를 어렵게 하는 '교각살우(矯角殺牛)'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정부의 주택공급 확대 정책에도 역행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택산업연구원 김덕례 주택연구실장은 "건설임대는 저렴한 임대료로 서민들이 최장 10년간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터전"이라며 "전세사기와 보증금 미반환 문제를 사전에 대응한다는 것이 오히려 건설 임대주택 공급 감소와 막대한 보증사고 발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제도개선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