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서울=곽재근 기자] "봄만 되면 붉은 장미들이 화사하게 피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곳저곳에서 이야기하곤 했죠. 근데 지금은 이렇게 높은 빌딩들로 가득 찼네요. 여기서 일하는 젊은 노동자들이 지금은 사람답게 살고 있을까요."
구로공단 출범 60주년을 일주일 앞둔 지난 7일 서울 금천구 가산로데오거리. 강명자(62)씨가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강씨는 열여섯 나이에 상경해 이곳에서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며 가족을 뒷바라지했던 1980년대 전형적인 '공순이'였다. 지금도 베테랑 미싱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와 함께 40년 전 청춘을 보냈던 구로공단을 둘러봤다.
구로공단은 1964년 9월 14일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이 제정되면서 '국내 1호 국가산업단지'로 만들어졌다. 봉제와 가발 등 경공업 공장이 이곳에 밀집해 '수출 한국'의 전초기지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번영의 이면엔 수많은 이들의 피땀이 서려 있다.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공장 노동자들의 터전이었던 구로공단은 조세희의 베스트셀러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배경이 됐고, 민주화운동에 나선 수많은 대학생이 모여든 '의식화' 현장이기도 했다.
소작농의 딸이었던 강씨는 일자리를 찾아 고향인 전남 나주에서 상경했다. 낮에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밤에는 공부하고 싶었던 그녀는 1982년 피복류 제조·판매업체인 대우어패럴에 취업하며 구로공단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하루 10시간 근무는 기본이고 새벽 5시까지 철야도 부지기수였다. 쪽방이 빼곡한 '벌집' 숙소에서 고단에 지친 몸을 달랬다. 강씨는 "생리대를 갈 시간도 없어 어린 여공들이 피 냄새를 풍기며 일했다"며 "잠을 쫓기 위해 타이밍(각성제)을 사 먹거나 커피믹스 가루를 봉지째 입에 털어 넣기도 했다"고 떠올렸다.
여공들의 노동력에 힘입어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이 가능했지만 사회에서 되돌아온 것은 '공순이'라는 경멸 섞인 시선이었다.
배꼽티를 입고 고고장을 즐기던 '날라리 언니' 강씨가 현실에 눈을 뜬 건 '학출'(대학생 출신 노동자) 언니가 건네준 '전태일 평전'을 읽고부터였다.
근로 현장의 열악한 현실을 고발하고 노동자 권리를 위해 몸을 불사른 전태일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로 남았지만, 현실은 여전했다. 강씨는 "밤새워 책을 읽고 목이 메어서 다음 날 아침 식사로 나온 수프를 먹을 수 없었다"고 했다.
강씨는 1984년 조직된 노조에서 사무장을 맡았다. 남자 직원에게 여러 차례 머리를 잡히며 구타당했고 이듬해에는 다른 노조 간부 2명과 함께 구속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때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노조를 시작했어요. 할당량을 못 채웠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머리 쥐어박는 게 싫었어요. 미싱이 고장 났다고 말하면 고쳐주겠다며 여자들 옆에 와서 성추행하니 함부로 말도 못 했죠."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강씨 등의 구속에 항의해 파업에 돌입하자 구로공단 내 다른 기업 노조의 연대파업이 들불처럼 번졌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의 시작이었다.
강씨는 지난해 회사와 정부로부터 노조 탈퇴와 사직을 강요받아 인권이 침해됐다며 당시 노조원들과 함께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강씨는 "노조 활동을 하며 당한 폭력 탓에 상처받고 지금은 연락이 끊긴 '식구'들도 많다'"며 "'우리의 행동이 정당했고 국가와 회사의 탄압이 불의였다'는 사실을 인정받아 그 친구들의 마음의 응어리라도 풀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출소 뒤 생계를 위해 새 직장을 찾으려 구로공단을 전전했지만 면접관은 '블랙리스트'를 꺼내 들기 일쑤였다. 강씨는 "화사한 봄날 면접에서 떨어지고 울던 기억 때문에 지금까지도 봄바람이 싫다"고 했다.
구로공단은 이제 첨단 지식산업단지 G밸리로 바뀌어 고층 빌딩들이 들어선 지 오래지만 강씨의 재봉틀은 오늘도 돌아간다. 강씨는 현재 공단 인근의 영세 작업장에서 비정규직 미싱사로 일하고 있다.
강씨는 "구로공단에서의 치열했던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만약에 스무 살의 강명자를 만난다면 '그냥 네가 마음먹은 대로 하라'고 격려해주고 싶어요. 제가 만든 작품에 제 이야기를 집어넣는 '미싱 박사'라고 자부합니다. 그저 맹목적이고 수동적으로 산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더불어 사는 것을 추구한 삶이었어요."